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량 해전 (문단 편집) === 불타는 관음포와 이순신의 죽음 === '''1598년 12월 16일(음력 11월 19일) 오전 8~10시''' * 일본 수군은 명나라+조선2군 방향이 아닌, 이번엔 조선1군 즉 [[이순신]]의 대장선 방향으로 탈출하려 한다.[* 시마즈 가문은 포위된 상황일수록 오히려 적의 대장 방향으로 돌파하는 전략을 짜곤 한다. 스테가마리(捨て奸)라 불리는 이 전략은 [[시마즈의 퇴각]] 문서 참고.] * 따라서 [[이순신]]의 대장선을 비롯 전라좌수영 군이 직접 돌파를 시도하는 선박들을 추격-포위한다. 일본군 선두의 [[시마즈 요시히로]]의 대장선(안택선)이 반파되어 작은 배로 옮겨타야 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위기에 처한다.[* 시마즈 가문의 기록인 일향기, 정한록 등이 출처.] * 일본군 후방의 [[타치바나 무네시게]] 군이 관음포를 또 빠져나와 조선1군의 후방을 찌르고 들어오면서 난전이 발생했다. 이 덕에 시마즈 요시히로도 탈출에 성공했다. * 이 난전으로 조선1군의 전라좌수영 다수 장수들이 전사했고, 최고지휘관 '''[[이순신]] 역시 전사했다.''' '''[[이순신]]의 죽음''' * 총탄을 맞은 경위 * 이덕형의 조선왕조실록 보고에 따르면 "혈전을 하던 중 이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"라고 주장했다. * 류성룡의 '비망기입대통력-경자'에 따르면 "장군이 직접 화살을 쏘고 돌팔매를 하자, 부장들이 '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'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고,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아 전사했다고 주장했다. [[https://www.hani.co.kr/arti/culture/culture_general/1068651.html|#]] * 총탄을 맞은 방향 * 류성룡의 징비록은 '총탄이 가슴을 관통해 등 뒤로 빠져나갔다'고 주장했다. * 안방준의 은봉전서는 '총탄이 겨드랑이 아래(腋下)'에 맞았다'고 주장했다. * 이순신의 유언 * 1598년, 류성룡은 징비록으로 "'''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'''[* 戰方急愼勿言我死, 전방급신물언아사.]"는 유언을 남겼다고 주장했다.[* 약간 뒤 초판이 간행된 행록에는 별 이야기가 없다가 재간을 거듭하며 유언이 첨부되었기에, 몇몇 연구자는 해당 유언이 징비록에 없었거나 다른 내용이었을 가능성을 신중히 제기한다.] * 1617년, [[광해군]]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로 "부디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고,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려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하라"[* 愼勿發喪, 揚旗鳴鼓, 猶我之生.]고 유언을 남겼다고 주장했다. * 1631년, [[이원익]]은 [[인조]]에게 "(이순신이 흐느끼는 아들에게)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(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)"[* 與賊對陣, 愼勿發喪.]고 유언을 남겼다고 주장했다. [[https://sjw.history.go.kr/id/SJW-A09040050-00700|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]] * 이순신의 죽음이 전투 중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지만, 이순신의 전사를 듣고 분기탱천해 분전하다가 부상, 전사했다는 기록도 꽤 나온다. 대장선에 동승했던 [[송희립]]도 부상을 입었고, 유형은 탄환을 6발이나 맞고도 전투를 독려했고, 가리포첨사 이영남 역시 잔적을 소탕하다 전사했다. * 지휘를 이어한 [[손문욱]][* 손문욱은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귀순해 다시 조선 장수가 된 특이한 이력의 인물이다.] * [[조선왕조실록]]에 [[이덕형]]은 "이순신이 전사하자 그 아들(이예)이 울려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. [[손문욱]]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고 북을 치며 진격하니,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이 죽지 않다고 여겨 용기내어 공격했다"고 보고했다. * [[조선왕조실록]]에 [[권율]]은 "[[손문욱]]이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한 뒤 임기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습니다. 손문욱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진 도독이 함몰을 면한 것도 우리 주사의 공이었습니다"라고 보고했다. * [[인조]]는 [[선조수정실록]]에 그의 조카 [[이완(1579)|이완]]이 대신 지휘했다고 기록을 변경했다.[* 선조수정실록은 [[인조반정]] 이후 기록이므로, 손문욱이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들과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에 공적을 삭제한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.] '''1598년 12월 16일(음력 11월 19일) 오전 10~12시''' * 바다는 왜선 2백여척이 부서지고 시체, 판자, 무기, 갑옷이 뒤덮여 물이 흐르지 못하고 붉었다. * 일본군 50척 가량은 관음포에서 탈출에 성공해 외해로 도주했다.[* 해전 뒤 최종적으로 도망에 성공한 일본 함대는 명나라 기록에 따르면 50척, 일본 기록에 따르면 60척이다.] * 일본군 100척 가량은 관음포에서 탈출에 실패해 배를 버리고 남해도에 상륙, 도주했다.[* 이덕형의 보고에 따르면 (나포된, 즉 불타지 않은) 1백여척어치 인원은 남해로 상륙해 도망쳤다.] 이는 이틀 뒤 [[남해왜성 소탕전]]으로 이어진다.[* 다수는 남해도에서 다시 뗏목을 급히 지어 한반도로 도주했고, 1천명 가량은 남해도에서 나가지 못 하고 소탕되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